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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테일러 연애편지 온라인 경매…RR옥션, 내달 12~19일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17살 때 첫 약혼자 윌리엄 폴리에게 쓴 연애편지가 경매에 부쳐진다고 BBC뉴스가 3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미 RR옥션은 1949년 3월부터 8개월 동안 쓴 편지 66통을 폴리에게 2년 전 사들였으며 오는 5월 12일부터 19일까지 온라인 경매에 내놓는다고 밝혔다. RR옥션 대변인 바비 리빙스턴은 “편지는 원래 상태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면서 “아주 소중하게 보관해왔던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1949년 3월28일에 쓴 편지에 테일러는 폴리에게 “결혼해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도 언제나 ‘연인’이길 바란다. 영원히 함께 하자”고 썼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나는 당신(폴리)만을 사랑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같은 해 9월 폴리가 다이아몬드 약혼반지를 돌려달라고 요청한데 대한 답장에서 테일러는 “우리가 난 것은 아니다”라고 써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7명의 남편과 8번 결혼한 테일러는 2004년부터 울혈성 심부전증을 앓다 지난달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79세의 나이로 숨졌다. 두 차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고 말년에는 에이즈 퇴치 활동에 헌신한 공로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테일러에게 귀족 작위를 내렸다.

2011-04-04

리즈 테일러의 6억불 재산 향방은…자신이 설립한 '엘리자베스 에이즈 재단' 으로 갈 듯

지난 23일 지병으로 숨진 ‘세기의 여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남긴 재산의 향방에 세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24일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등 외신들에 따르면 테일러의 재산은 최소 6억달러(약 6685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건강악화에도 자서전 집필에 몰두했으며 자서전이 조만간 출간되면 인세 수입 등으로 그녀의 재산은 더욱 불어날 것으로 보인다. 뉴욕포스트는 테일러가 1994년 공사장 노동자인 래리 포텐스키와 이혼했을 당시 이미 순자산이 6억840만 달러로 추정됐다고 보도했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10억 달러를 넘을 수 있을 것으로 신문은 관측했다. 테일러는 60년간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최고 수준의 출연료를 받았다. 특히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는 주연을 맡아 출연료로 100만 달러의 벽을 깬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녀는 세계적인 배우였을 뿐 아니라 사업가로서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 부를 쌓았다. 자신의 향수 브랜드인 ‘화이트 다이아몬드’로 지난해에만 7000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렸을 정도다. 테일러는 1990년대 초당 2달러씩, 연간 6300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외신들은 테일러의 유산이 에이즈 자선단체로 갈 것으로 전망했다. 테일러가 말년에 ‘엘리자베스 에이즈 재단’을 설립해 에이즈 퇴치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왔기때문이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 온라인판은 테일러가 에이즈 자선단체에 재산 일부를 남겼다는 친구들의 말을 전했다. 또 2002년 이미 1억 5000만 달러로 추정됐던 테일러의 보석 컬렉션은 경매에 부쳐져 수익금 대부분이 그녀가 세운 에이즈 재단 등에 돌아갈 것 같다고 시카고 지역 TV가 보도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테일러의 가족들이 그녀의 유산을 놓고 분쟁 중이라고 밝히기도 해 유산이 어디로 갈지는 아직 미지수다. [연합]

2011-03-25

6년전 사망한 기자 리즈 테일러 부고 작성

뉴욕타임스(NYT) 24일자 신문에는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사진)의 부고기사가 1면 머리기사로 배치됐다.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은 멜 구소(Gussow). 그런데 1면에 이어 28면에 이어진 기사의 밑부분에 달린 주석엔 "이 기사의 주 작성자인 멜 구소는 지난 2005년에 사망했다. 윌리엄 맥도널드 등 3명이 기사의 업데이트에 참여했다"고 적혀 있다. 말하자면 6년 전에 이미 사망한 기자가 지난 23일 사망한 여배우의 부고 기사를 작성한 셈이다. 어찌된 일일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인터넷판 기사에서 NYT의 이 이상한 현상에 대해 유명인의 사망 전에 이미 부고 기사를 작성해두는 신문과 잡지의 관행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사망할 경우에 대비해 구소 기자가 그의 일생을 조명한 기사를 미리 작성해뒀는데 정작 기사의 주인공보다 기사 작성자가 먼저 사망했다는 것이다. NYT는 구소가 작성해둔 부고 기사가 훌륭하다고 판단 다른 기자들의 보강을 거쳐 지면에 원 작성자의 이름과 함께 발행한 것이다. 영화평론가이기도 한 구소는 지난 35년간 NYT에 몸담아왔고 71세였던 지난 2005년 암으로 사망했다. NYT의 부고 담당 편집인인 빌 맥도널드는 WSJ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약 4000단어로 구성된 구소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부고기사가 "던져 버리기엔 너무나 좋았다"고 말했다.

2011-03-24

떠나간 '세기의 연인'…스크린 통해 다시 만난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떠났지만 그녀의 영화들은 남았다. 찬란한 미모를 뽐내는 고고한 여왕에서부터 헝클어진 머리로 남편에게 쉴새없이 욕설을 퍼붙는 중년여성까지,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연기 스펙트럼은 넓고도 화려했다. 할리우드의 전설로 남을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기억하기 위해 일부 케이블 채널에서는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하기도 했다. 폭스 영화 채널은 오는 27일 테일러의 대표작 '클레오파트라'를 4차례나 반복 상영하기로 결정했다. 고전영화전문채널인 TCM은 오는 4월 10일 24시간 동안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출연작 11편을 마라톤 상영한다고 발표했다. 그녀의 대표작들을 다시 한번 찾아 감상하려는 팬들의 열기도 뜨겁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추억하며 꺼내 볼만한 그녀의 대표작들을 모아봤다. 1941년작 영화 '귀로'(There's One Born Every Minute)는 만 10세의 나이에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처음 출연했던 영화다. 테일러의 어머니가 당시 영화제작사였던 유니버설 픽처스 회장의 부인과 절친했던 덕에 캐스팅 기회를 얻은 것이라는 뒷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후 테일러는 '용감한 래시'(Lassie Come Home)라는 가족 영화에 출연했지만 주인공 개가 받던 주급 250달러의 반도 못 미치는 100달러의 주급을 받으며 연기를 해야 했다. 1944년작 '녹원의 천사'(National Vel-vet)에서 소녀기수로 출연했던 12살 테일러의 모습은 팬들에게 가장 오래 기억되는 아역배우로서의 모습이다. 1950년대에 들어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당대 최고의 미녀이자 섹시 심볼로 성장했다. 시작은 1951년작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였다. 테일러는 이 작품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교계의 꽃 앤젤라 역을 맡아 빼어난 미모를 과시했다. 1954년 스콧 피트제랄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비극적 멜로 영화 '내가 본 마지막 파리'(The Last Time I Saw Paris)에서도 그녀는 가난한 작가와 사랑에 빠진 상류층 여성을 연기해 자신의 매력을 맘껏 뽐냈다. 55년 제임스 딘과 주연했던 '자이언트'(Giant)에서 사랑과 성공에 대한 갈증 혼란스러웠던 시대상을 온 몸으로 연기한 그녀는 이미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할리우드의 여왕' 이었다.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까지는 그녀의 전성기였다. 58년부터 67년까지 그녀는 총 5번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고 2차례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이 가운데 57년작 '애정이 꽃피는 나무'(Raintree County)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Cat on a Hot Tin Roof)에서는 농염한 여인으로서의 매력을 뿜어내며 영화계를 놀라게 했다. 59년작 '지난 여름 갑자기'(Suddenly Last Summer)에서는 캐서린 햅번과 불꽃튀는 연기 대결을 펼쳐 찬사를 받았다. 3년 연속으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고도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했던 테일러는 1960년 '버터필드 8'(Butterfield 8)에서 비로소 첫 여우주연상 수상의 꿈을 이룬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콜 걸로 열연한 결과였다. 66년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Virginia Woolf)도 테일러에게 다시 한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줬다. 언제나 아름답게만 보였던 이미지에서 과감히 탈피 신경질적인 중년여성을 연기한 테일러는 이 작품에 이르러 비로소 미모 뿐 아니라 불꽃같은 연기력으로도 할리우드를 사로잡은 당대 최고 여배우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63년작 '클레오파트라'도 빼놓을 수 없다. 5년여에 걸친 기나긴 촬영기간과 막대한 제작비를 투자해 빚어낸 스펙터클한 영상 그리고 테일러의 완벽에 가까운 미모가 결합돼 할리우드 역사에 길이 남을 역사물이 완성됐다. 테일러는 이 작품을 촬영하며 리차드 버튼과 사랑에 빠져 2번의 결혼과 2번의 이혼을 반복했다. 버튼은 화려했던 남성 편력을 자랑했던 테일러의 전 생애를 통틀어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남자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경민 기자 rachel@koreadaily.com

2011-03-24

화려한 남성편력(7명의 남자와 8번 결혼)…"가장 사랑했던 남자는 버튼"

엘리자베스 테일러 타계 '할리우드 사상 최고의 미인' '세기의 미녀'. 23일 타계한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이름에 항상 따라다니던 수식어였다. 193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테일러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직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열 살 때 영화 '귀로'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첫발을 디뎠고 44년 '녹원의 천사'로 주목받는 아역 스타가 된다. 깜찍한 미모와 정확한 발성이 뒷받침된 당찬 연기는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눈에 쏙 들었다. 어린 나이에 유니버설.MGM등 메이저스튜디오에 발탁된 그는 이후 '젊은이의 양지' '자이언트' 등에 출연하며 탄탄대로를 달렸다. 테일러는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7명의 남자와 8번 결혼하며 이혼을 거듭했다. 여덟 번째 결혼식을 올릴 당시 테일러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상대는 알코올 중독 재활센터에서 만난 20살 연하의 중장비 기사였다. 그의 결혼 중 가장 대중의 이목을 끌었던 건 당대의 스타 리처드 버튼과의 로맨스다. 50 60년대 할리우드 최정상급 스타였던 두 사람은 63년 '클레오파트라'에서 만나 사랑을 시작했다. 테일러는 당시로선 파격적 액수인 100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았다. 두 사람은 결국 각자의 배우자를 버리고 64년 결혼식을 올렸고 10년만인 74년 공식적으로 결별했다. 그리고 1년 후 재결합했다. 하지만 넉 달 만에 다시 갈라섰다. 테일러의 남자 관계는 평생에 걸쳐 복잡했지만 가장 사랑했던 남자는 리처드 버튼이었다. 생전 그는 죽으면 화장해서 재를 버튼의 고향에 뿌려달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테일러는 생전 두 차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60년 작 '버터필드8'과 66년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두 편을 통해서다. 기선민 기자

201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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